박물관에 나오자마자 믹스커피 한 잔을 한다.
달달한 이 맛.
느긋한 이 기분.
그러고 보니 정년퇴직 뒤 다니던 회사 생각이 난다.
무슨 일로 조기 퇴직한, 그러다 보니 당연히 나보다 나이가 적었던 한 간부가
믹스 커피를 마시면서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퇴직하고 나니 가장 아쉬운 게 믹스커피였어요.
회사 다닐 땐 하루 10 잔, 스무 잔 생각 없이 마셔댔는데
정작 집에서 마시려니 단 한 잔도 얼마나 부담이 되던지.....
그러면서
봉급은 전 직장의 반의반도 안 되지만
마음대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것만으로도
지금 생활이 행복하단다.
그 말을 듣고
이 자가 주머니가 빈궁하니 마음마저 빈한해졌구나
속으로 불쌍하게 생각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일간 전문지에서
기자로선 최고의 직위까지 올랐던 사람이
공짜 믹스커피에 이처럼 감읍하다니....
그런데 직장 생활을 완전히 접고 집안에 들어박히자
나에게도 믹스커피가 다르게 다가왔다.
내가 커피를 이리 많이 마셨던가?
아메리카노를 하루 한, 두 잔씩 하면서도
믹스커피를 따로 서, 너 잔을 마신다.
그러다 보니 한 박스 사다 놓아야 얼마 안 가 바닥이 난다.
커피값이 장난이 아닌 것이다.
급기야 믹스커피 중독(?)인 아내와
건강에 안 좋다는 핑계로 그만 마셔라, 마라
티격태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제 비록 봉사직이지만 박물관에 다니면서
믹스 커피는 다시 아무 갈등 없이 마시게 됐다.
예전의 그 친구처럼 행복까지는 아니라도
여간 흡족한 게 아니다.
커피라기보다는 설탕물에 가까운 믹스커피.
대단한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당뇨 비만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데
이렇게 끌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서민들에게 믹스커피는
커피라기 보다 무료할 때 먹는 간식,
당 떨어질 때 마시는 응급처방.
지친 몸과 기분을 풀어주는 피로 회복제 아닐까?
<작성자 = 마음 가는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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