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각스님이 혜민스님을 야멸차게 꾸짖었다.
부처님 가르침을 모르는 도둑놈으로
단지 부처님을 팔아먹는 장사꾼,
스님을 연기하는 배우일 뿐이란다.
그동안 지나치게 자주 언론에 등장하며
불경깨나 읽으면 누구나 아는 내용을
마치 도통한 사람처럼 씨부리더니
최근 남산뷰를 뽐내는 서울 도심 자택을 공개한 것이
화근이 됐다.
현각스님뿐 아니라 인터넷에서도
무소유가 아닌 풀소유라며 비난이 한창이다.
하바드 출신인 현각스님은
숭산스님을 만나 출가한 뒤 한국 불교에 귀의했다.
그러나 숭산 사후 2016년 한국 불교문화를 비판하면서
한국을 떠나 유럽에서 활동중이란다.
한국불교에 기복적 요소가 많은 것과
외국인 승려를 장식품 취급하는 것에 화가 났던 것 같다.
혜민 스님은 내 언제고 그런 사달이 날 줄 알았다.
혜민은 도를 말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다.
붓다가 35세에 득도했다지만
그건 정말 예외적인 일이다.
범인은 평생을 바쳐도 될까 말까, 아니 안 된다.
비범한 사람도 어렵다.
그런데 지가 얼마나 안다고 그리 나부대는가?
그러나 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누가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 것이 불가의 방식이다.
부처 역시 누가 물어볼 때만 법문을 들려줬다.
왜?
이 세상에 누구에나 통하는, 일반적 진리는 없기 때문이다.
이때, 이 순간, 이 사람에게만 통하는
각자의 진리가 있을 뿐이다.
붓다의 8만4천 법문은
바로 8만4천명과의 대화록, 처방전에 다름 아니다.
누구에게나 타당한,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
각자에게 필요한 처방이 있을뿐이다.
이 때문에 붓다의 법문에는 상호모순이 수두룩하다.
이 사람에게는 약인 것이 저 사람에게는 독일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 언어철학이 이제야 느낀 문제를
붓다는 그때 이미 알았다.
혜민은 곧바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의 뜻을 밝혔다.
앞으로 모든 사회활동을 접고 수행에만 정진하겠단다.
그러자 현각스님은 갑자기 혜민을 추켜세웠다.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란다.
70분간 전화를 나눠보니 그렇단다.
혜민스님의 참회는 다행한 일이지만
현각스님도 참 우습다.
불제자 답지 않게 과격한 비난을 쏟아내더니
하루도 안돼 자기 말을 뒤집어버리는가?
그럴려면 미리 대화를 나눠보지.
그 역시 알지도 못하고 그냥 씨부렸던가?
속세나 승가나 참 말이 많은 시대다.
나는 어떤가?
나는 더 한가?
붓다의 제자임을 자처하다보니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 같다.
그러나 경계만 당하면 바로 옛날로 돌아간다.
붓다의 가르침을 증득하지 못한 탓이다.
생각하면 나도 한심하다.
갈길이 멀다.
글은 더드라이브 외부 필진이면서
전(前) 신문기자, 현(現) 농부인 김지완 님의 칼럼입니다.
우리 주변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적고 있으며 ,김지완 님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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